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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지식] 새로 읽는 조선 … 고려 지배층 그대로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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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지식] 새로 읽는 조선 … 고려 지배층 그대로 남아

[중앙일보] 입력 2013.03.23 00:48 / 수정 2013.03.23 00:48
조선왕조의 기원
존 B 던컨 지음
김범 옮김, 너머북스
488쪽, 2만5000원


미국 UCLA 대학의 한국사 연구자 존 던컨(68) 교수의 노작(勞作)이다. 제목만을 놓고 볼 때 고려 후기 이후의 역사를 다룬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은 조선왕조의 기원을 고려 건국 전후까지 거슬러 올라가 찾고 있다. 조선과 고려 사이의 오랜 지속성을 강조하는 셈이다.

 제목을 조선왕조의 ‘형성’이라고 하지 않고 역사연구자들이 가능한 쓰지 않으려는 ‘기원’을 선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터다. 조선왕조의 건국을 왕조 교체가 아닌 신흥사대부의 등장 등 지배계층 교체로 해석해온 그간의 선행 연구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서다.

 이런 내용은 한국사의 상식적인 흐름과 큰 차이가 있다. 주요 시기마다 새로운 사회세력이 등장해 역사를 끌어가고, 또 그들이 지배세력으로 부상했다는 게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한국사다. 예컨대 신라 말 진골에 대항했던 육두품 등 호족의 등장, 이어 문신귀족에 반기를 들었던 무인들의 진출, 지방 향리 출신 신흥 사대부의 출현과 조선의 건국, 나아가 조선 전기 훈구파에 맞선 중소 지주 출신 사림파의 등장과 사화, 경영형 부농의 출현과 농민 봉기 등이 그것이다. 주도 세력의 교체와 확장을 강조하는 논리는 현행 역사 교과서의 기조를 이루고 있다.

고려말 무신으로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1335~1408)의 초상화. 조선왕조의 건국을 신흥사대부의 등장에 의한 지배계층 교체로 본 기존 한국 역사학계의 학설을 던컨 교수는 정면으로 비판하며 고려와 조선 권력층의 오랜 지속성을 강조한다. [중앙포토]
 던컨 교수는 이런 도식에 문제를 제기한다. 특히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와 그 의미를 둘러싼 종래의 시각을 근본적으로 뒤흔든다. 그는 무엇보다 조선의 건국을 신흥 사대부의 출현과 연관 짓지 않는다. 고려 전기 이후 계속 추구해온 중앙 집권적 관료체제의 완성으로 보는 것이다. 고려의 중앙 관료 귀족이 지방 귀족인 향리를 완전히 제압하는 긴 역사적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

 신흥사대부의 등장과 조선의 건국이라는 통설에 익숙한 독자에게 이런 주장은 충격적일 것 같다. 던컨 교수는 이런 점을 고려해 고려의 정치제도, 중앙 관료적 귀족의 흥기, 왕조교체기의 양반, 고려후기의 제도적 위기, 개혁과 왕조 교체, 개혁 이념 등을 집중 검토한다.

 특히 고려 이후 조선 초기까지 중요 관직자들의 출신 가문과 등용 방식, 경력 등을 치밀하게 따진 대목이 인상적이다. 그 결과, 조선왕조의 건국 주체들이 고려의 지배 엘리트들 연장선상에 있었고, 또 이들의 기원이 고려 건국 전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을 극명히 드러내고 있다. 요컨대 이 책은 조선의 건국에 대한 문제 제기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역사상까지 제시하고 있다.

 이런 논의의 근간에는 귀족제와 관료제 사이의 긴장과 형평이라는 저자의 보다 큰 구도가 깔려 있다. 이는 한국학의 대부로 불렸던 제임스 팔레(1934~2006) 교수가 조선 왕조사회의 특성을 밝히려 도입한 가설인데, 던컨 교수는 이를 고려 왕조까지 확장하고 있다. 고려와 조선 사이의 지속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저자는 한국사학계의 ‘내재적 발전론’과 그 문제점을 거듭 비판한다. 내재적 발전론은 일반인도 꽤 친숙한 이야기일 듯하다. 일제는 한국 병합을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사의 정체성을 강조했고. 해방 이후 한국 역사학계는 이를 극복하는 데 주력해왔다. 내재적 발전론은 이 과정에서 형성됐다. 시기별 주요 변동을 역사의 역동성과 발전의 징후로 해석했다. 한국사 지배 세력의 변천에 대한 논의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이 가설은 서구의 역사 발전을 보편적인 모델로 간주하는 한편 자민족 중심주의도 표방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래 전부터 비판받아왔다. 이 책 역시 학계의 주류로 굳어진 내재적 발전론과 지적 긴장을 보여주고 있으나 향후 건설적인 논의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그만큼 시각차가 큰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의 특장을 놓쳐선 곤란하다. 전문 연구서로서의 공력이 있을 뿐 아니라 글이 유려해 일반 독자도 저자의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다. 역사의 대중화라는 화두에도 중요 논점이나 내용은 여전히 전문가들의 세계에만 갇혀 있는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풍요로우면서도 깊이 있는 역사 서술을 만나는 즐거움이 각별하다.

이훈상
 서평에서 흔히 옮긴이를 언급하지 않는 데, 이 책에선 번역의 의미를 되새겨봐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역자 김범(43·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씨는 이미 제임스 팔레 교수의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을 옮긴 적이 있는데 또 다시 이 어려운 작업을 마무리했다.

 그 동안 에드워드 와그너· 마르티나 도이힐러 등 서구의 한국사 연구자들은 도식적이거나 획일적인 역사 이해를 경계해왔다. 요즘 우리 사회는 이해·입장·해석의 다양성을 지향하고 있다. 주류 한국사 연구와는 다른 시각에서 쓰인 이들의 연구 성과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이제 던컨 교수의 논저도 추가할 수 있게 됐으니 고마운 일이다.

이훈상 동아대 교수·한국사

●이훈상 한국사회사·문화사·예술사 전공. 저서 『조선후기의 향리』(일조각)로 두계학술상을 받았다. 역서로 『전통 한국의 정치』(제임스 팔레지음) 『한국사회의 유교적 변환』(마르티나 도이힐러) 『조선왕조사회의 성취와 귀속』 (에드워드 와그너) 등이 있다. 하버드대·듀크대·도쿄대 초빙학자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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