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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한인 1세 미국 시장 강석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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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한인 1세 미국 시장 강석희 (2)

[중앙일보] 입력 2008.12.23 11:43 / 수정 2008.12.23 15:39

畵手 조영남 토크쇼 “무작정 만나러 갑니다” ⑫

월간중앙 조영남 고향이 어디에요?

강석희 고향은 이북 개성입니다. 어머니께서 저를 뱃속에 넣은 채 월남하셔서 서울에서 출산하셨다고 해요. 본적은 서울 예지동입니다. 종로5가에서 태어났죠. 연지동에서 자랐고요.

조영남 연지동?

강석희 한일극장·보령약국이 있는 자리죠. 지금도 보령약국이 있습니까?

조영남 하하하….

강석희 보령약국골목으로 들어가면 거기에 예전에 조향유치원이 있었어요. 정신여고 바로 앞에요. 거기서 제가 대학 다닐 때까지 살았습니다.

조영남 대학을 한국에서 다녔어요?

강석희 제가 종로5가에 있는 효제초등학교를 나와, 중학교는 혜화동에 있는 동성중학교, 고등학교는 그 맞은편에 있는 보성고등학교를 나왔죠. 대학은 그 옆 고려대학교를 졸업했고요.

조영남 (깜짝 놀라 자세를 바로잡으며) 아니, 도대체 강석희가 어떤 사람이기에 서울 한복판에서 자란 사람이 이역만리, 그것도 세계 일류 나라에서 시장이 된 거야?

강석희 1971년 고려대 농경제학과에 입학했죠. 그리고 2학년을 마치고 34개월을 군생활을 했죠. 육군 병장으로요.

조영남 그건 나랑 똑같네.

강석희 그리고 1975년에 제대해서 1977년에 졸업하고, 그 해 6월11일 하와이 땅을 밟았죠.

조영남 그때가 몇 살이었죠?

강석희 미국 나이로 스물세 살이었습니다.

조영남 나처럼 ‘미국에 가서 문물이나 익혀 오겠다’였나? 아니면 무슨 나름의 뜻이 있었나?

강석희 큰 뜻은 없었어요. 솔직히 말하면, 저보다 열두 살이 많은 형님이 1962년에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해 있었어요. 그래서 항상 나도 언젠가 형님이 있는 미국으로 가야지 하는 생각이 있었죠. 그래서 고등학교 때부터 영어회화클럽에 가입해 열심히 영어공부를 했고요. ‘파인트리클럽’이라고, 그 클럽이 지금도 남아있어서 2008년 11월1일 대대적으로 50주년 행사를 했죠.

조영남 와우~. 그 클럽 멤버들이 강 시장이 당선됐을 때 정말 흥분했겠네요?

강석희 하하…. 저 말고도 성공하신 분이 많아서 저는…. 강재섭 한나라당 전 대표, 유재건 의원도 그렇고….

조영남 아! 그 영어 잘하는 변호사 출신이신…!

강석희 그분이 연세대 다닐 때 우리 클럽에서 활동하셨어요. 또 김종훈 자유무역협정(FTA) 통상본부장, 문동호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도 우리 클럽 출신이시고, 민상훈 교수님 등 교수가 되신 분도 많고요. 당시 서울에서 대학 다니는 학생 중 영어에 관심 있는 학생들이 모인 클럽이어서 영어연극이나 영어웅변을 해서 여기저기서 상도 많이 타오고는 했죠.

조영남 그럼, 스물세 살 때 미국에 도착해서는, 그 뒤로 어떻게 되나요?

강석희 1977년 6월에 왔는데, 제가 한국에서 영어를 좀 한 덕분에 오자마자 ‘서킷시티’라고 당시 미국에서 가장 큰 전자제품 판매회사에 세일즈맨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입사 4개월 만에 세일즈맨 중 1등을 했고요. ‘엔트리 레벨’에서 전문 세일즈맨으로 2년 연속 제가 1등을 했어요.

조영남 스물세 살에 도착하자마자 미국 본토 사람들을 상대했다는 뜻이네요?

강석희 그렇죠. 그게 미국생활을 배우는 데 도움이 많이 됐어요.

LA폭동’ 계기로 한인사회 관심 가져

조영남 미국사람을 상대할 만큼 영어를 준비했었다는 뜻인가요?

강석희 그랬다고 볼 수는 없지만, 아무튼 대학교 다닐 때 ‘파인트리클럽’에서 활동하면서 영어웅변대회에 나가 1등도 했고, 영어연극도 해보고 그러던 것이 도움이 많이 됐죠.

조영남 스물세 살에 미국 와서 판매회사에 들어갔다는 것이 오늘 인터뷰에서 가장 하이라이트다! 그 생활을 몇 년이나 했어요?

강석희 서킷시티에서 15년 근무했죠.

조영남 15년 근무하면서 어디까지 올라갔어요?

강석희 ‘톱’은 못 갔고….

조영남 ‘톱’이라는 게 뭐예요?

강석희 매니저 중에서 가장 높은 자리죠.

조영남 갈려면 갈 수는 있었나?

강석희 한계를 느껴 제가 나왔죠. 미국에는 ‘유리천장’이라고 해서 보이지 않는 벽이 있거든요. 거기에 부닥쳤던 거죠. 내가 실적이나 모든 면에서 어느 누구보다 우수했는데도 거기까지밖에 안 되더라고요. 그게 1992년도였습니다.

조영남 어바인 시장이 된 사람이 유리천장 운운하는 것은 좀 모순인데….

강석희 아무튼, 그래서 제가 1992년도에 회사를 그만뒀어요. 그런데, 우연히 1992년에 로스앤젤레스에서 흑인폭동이 일어났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한인사회와 전혀 관계 없이 지냈거든요. 그날 사무실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750개의 한인상점이 밤 사이에 전소되는 것을 지켜봤죠.
그런데 로스앤젤레스 경찰이 공권력으로 한인타운을 전혀 보호해 주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한인들이 스스로 총으로 보호해야 했어요. 안 그러면 흑인들이 또 와서 물건을 집어가니 지키기 위해서였죠. 그것을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보는데, 갑자기 머리가 ‘띵’ 하면서 한 대 맞은 느낌이었어요. 마치 하나님의 계시 같은…. 나도 한국사람인데, 한국인으로서 한국인 커뮤니티를 위해 뭔가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자각이 든 것이죠.
그러고 몇 달 후 회사를 떠나 1993년부터 한인사회에 들어가 일하기 시작했죠. 처음에는 한미장학재단 이사로 들어가 2세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일을 했고요. 그것이 시작이 돼서 한·미 민주당협회를 설립하기도 했어요.

조영남 기억할지 모르지만, 당신이 한·미재단에서 일할 때 나를 만났어.

강석희 당연히 기억하죠!

조영남 그때는 당신이 한인사회에서 왔다갔다하는 청년인 줄로만 알았지. 꿈이 시장도 아니었고…. 한 10년 전인가?

강석희 15년 전이죠. 한인사회에 들어와 일하다 보니 강석희라는 사람에 대한 평가가 슬슬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저 친구 열심히 일하고 성과를 많이 내는 친구다. 한인사회를 미국의 주류사회에 편입되게 정치적으로 신장하는 데 많은 노력을 하는 친구다” 하는 평가를 받았죠.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정치를 하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저 커뮤니티 서비스 차원에서 한인사회를 위해 일한다는 마음이었죠.

조영남 그런데 어쩌다 정치를 하게 됐어요?

강석희 그러다 ‘한미연합회(Korean American Corporation)’ 오렌지카운티 이사장을 맡으면서 한인사회와 지방정부를 접목하는 일을 하기 시작했죠. 그러다 보니 한인사회의 많은 분들로부터 “강석희, 당신 같은 사람이 정치일선에 나가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게 됐고요.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런 말씀을 해주시는 것이 감사하기는 했지만 정말 정치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그런데 2002년 어바인 주민으로서 당시 어바인 시장이셨던 래리 에이그런(Larry Agran)을 뵙게 된 것이 전환점이 됐습니다.

조영남 구체적으로 시장이 어떤 반응을 보였기에 지금 그런 말을 하지?

강석희 그때 시장님을 찾아뵌 이유가, 2003년 1월13일이 미주 한인 이민 100주년 되는 날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사는 어바인시가 첫 번째로 100주년 기념 선포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시장님에게 그 부탁을 하러 갔던 거죠. 그때까지만 해도 한인 커뮤니티는 미국 주류사회와 그런 교류가 거의 없었어요. 에이그런 시장 역시 제가 찾아갔을 때까지만 해도 한인 커뮤니티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죠. 그런데 기꺼이 승낙하셨을 뿐 아니라 제게 한인 커뮤니티에 대한 역사를 알려주면 고맙겠다고 하셨죠.

조영남 당신을 인정해 줬구나.

강석희 예. 그렇게 하면서 서로 알게 됐어요. 그 뒤 시장님이 제가 주최하는 행사에 여러 번 참석했죠. 그러면서 제가 점수를 많이 받았죠. 2004년 선거에 출마하기 1년 전쯤 저를 시의 재정 커미션으로 임명하시기도 했고요.
조영남 재정 커미션?

강석희 시의 예산을 심의하는 부서입니다.

조영남 그러면 그게… 미국의 공무원이 된 거예요?

강석희 공무원은 아니고, 무보수로 시에서 임명하는 자리예요.

조영남 아~. 그럼 그때까지는 아직 완전히 정치적으로 나간 것은 아니네. 얼마나 일했어요?
몇 달 정도 했을 때 (시장님이) 정식으로 저한테 제의하셨어요. 그 동안 저를 지켜봤는데 2004년 11월 선거에 같이 뛸 용의가 있느냐고요.

조영남 같이 뛴다?

강석희 네. 같은 팀으로요.

조영남 그럼 누가 시장으로?
에이그런 시장이 그 해가 시장 임기 마지막 해였어요. 그래서 에이그런 시장은 다시 시의원으로 출마하고, 저 역시 시의원으로 출마하고, 우리 팀의 다른 한 분이 시장으로 출마하자는 제의를 받았죠. 처음에는 저는 자격이 없다고 거절했어요. 고맙기는 하지만 저는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도 아니어서 도저히 시의원에 나갈 자신이 없다고 했죠. 그랬더니 그분께서 “가능성이 없다면 왜 네게 제의하겠느냐”며, 두 가지만 약속하면 저를 적극 도와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비 백인계 한인 시의원 첫 탄생

조영남 그 두 가지가 뭔가요?

강석희 하나는 후보가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돈을 많이 모아야 하는데, 그 후원금을 모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집집마다 일일이 방문해야 하는데, 그것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어요.
그 두 가지는 제가 할 수 있겠다 싶었죠. 우선 제가 알고 있던 800명한테 편지를 보내, 출마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어요. 제 나름의 여론조사를 해본 거죠. 800장 중 100장 이상 답장이 왔는데, 제가 너무 큰 성원을 받았어요. 왜 망설이느냐, 때가 됐는데 당연히 나가봐라 하는 의견이었죠. 한 사람도 나가지 말라는 사람이 없었어요. 거기서 제가 굉장히 힘을 받았죠.
조영남 내가 미국생활을 해봐서 아는데, 미국에서 로스앤젤레스나 뉴욕 같이 큰 시의 시의원은 웬만한 주지사나 상·하원의원보다 힘이 센 경우가 많은데….
출마하기로 가닥을 잡고 5개월 동안 하루에 4시간 이상씩 뛰어서 2004년 선거 때 2만 가구를 직접 방문했습니다.

조영남 캘리포니아의 그 뙤약볕 아래?

강석희 네. 2만 가구를 방문하고 나자, 사람들이 “석희 강” “석희 강” 하기 시작했죠. 제 이름이 ‘피터 강’이나 ‘샘 강’도 아니고 완전히 한국 이름이잖아요? 그런데 제 한국 이름을 미국인들이 부르기 시작한 것이죠.
또 한인사회에 제가 시의원에 출마합니다 하고 손을 벌렸더니 많은 분이 후원금을 보내주셨어요. 그 결과 첫 선거에서 15만 달러라는 거금을 모았죠. 1인당 기부할 수 있는 최대금액이 360달러이기 때문에 15만 달러면 엄청난 금액입니다. 50달러씩, 100달러씩 해서 800여 명이 후원금을 보내준 것이니까요. 이런 것이 미국 선거의 장점이기도 하고요. 한 사람한테 많이 받지 말고 여러 명한테 조금씩 받아서 그것을 표로 연결하라는 의도의 제도거든요.
어쨌거나 첫 선거의 성공으로 보수적인 어바인 시에서 비 백인계 한인 시의원이 처음 탄생하게 됐죠. 그리고 2006년 재선이 됐고, 2008년에는 시장이 됐죠. 시의원과 시장은 또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5개월 동안 2만 가구 일일이 방문

조영남 그때는 왜 유리천장 걱정을 안 했어요?

강석희 선거는 주민의 투표로 결정되잖아요?

조영남 선거는 유리천장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중요한 말이다.
선거는 제가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주민들이 투표로 보답해줍니다. 제가 2만 가구의 문을 다 두드리고 나자 “30년을 살면서 너 같이 열심히 캠페인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그것 때문에 내가 무조건 너를 찍어 주겠다”는 말이 들리기 시작했어요. 어떤 백인은 “나는 20년 동안 이 집에서 살았는데, 내 집 문을 두드린 후보는 처음이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너를 찍겠다”는 말도 해줬죠.

조영남 그런데, 나는 잘 상상이 안 가는 것이… 왜냐? 우리나라는 후보가 가정방문을 하는 선거운동이 없으니까…. 자, 문을 두드렸어요. 그럼 ‘누구세요?’ 할 거 아녜요, 그럼 뭐라고 해요? 사람들이 쫓아내지는 않아요?

강석희 30초 안에 깊은 인상을 심어줘야죠. 저는 웃으면서 “안녕하세요? 저는 강석희입니다. 제가 이번에 어바인 시의원 후보로 나왔습니다”라고 합니다.

조영남 아~. 그러면 최소한 쫓아내지는 않겠네. 물건 팔러 온 것은 아니니까.

강석희 그렇죠. 또 저는 방문하기 3일 전에 미리 편지를 보냅니다. 2만 가구를 방문하면서 주류 백인들에게 신뢰감을 준 것과 아시안계를 결집해 아시안계의 투표율을 높였던 것이 결과적으로 당선될 수 있었던 배경이었어요. 그때 제가 2만6,000표를 받았는데, 2등 후보와의 표차가 350표였거든요. 그러니까 그 한 표 한 표가 얼마나 중요했겠어요?

조영남 야~, 상대도 막강했네….

강석희 그럼요. 저는 정말 미국이라는 나라에 굉장히 감사하는 것이, 저 같은 이민자도 열심히 하면 정치를 통해 뭔가를 성취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잖아요. 저는 전 세계 국가 중 오직 미국만이 이러한 기회를 만들어주는 국가라고 생각해요. 솔직한 말로 필리핀이나 중국에서 한국으로 이민와서 귀화한 사람이 사업적으로 아무리 성공해도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면 한국사람들이 뽑아주겠습니까? 안 뽑죠. 저도 (제가 출마하기 전까지는) 똑같은 생각이었거든요.

오효림 기자 hyol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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