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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익의 인물 오디세이] 영화잡지 만드는 '스타' 조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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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익의 인물 오디세이] 영화잡지 만드는 '스타' 조용원

[중앙일보] 입력 2002.02.23 12:13
조용원(33)
본인은 자신에게 따라붙는 '불운의 스타' 라는 수식어가 악령처럼 지긋지긋할 것이다.

불운이란 물론 그녀의 배우 인생을 성공의 초입에서 파탄나게 한 열여덟살적 대학 1학년 때 당한 교통사고를 가리킨다.

그녀는 빛나야 할 대학시절에 얼굴의 흉터를 치료하고 가리느라 겨울에는 머플러로 얼굴을 감싸고, 여름에는 머리 한번 시원하게 올려붙여 보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의 조용원에 비춰 보면 그 상처의 콤플렉스가 그녀를 추동한 오기의 기제였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리고 이제 흉터는 주의해서 보지 않으면 '안 보인다' .

신문 한 귀퉁이에 조용원이 '시네버스(CINEBUS)
' 라는 영화전문 주간지를 창간했다는 단신이 눈에 띄었다. 반가웠다.

EBS의 영화프로그램 '시네마 천국' 을 진행하더니, 또 인터넷에 영화 웹진을 운영한다더니, 이제 주간지라, 과연 들풀같구나.

1992년 정지영 감독의 '하얀 전쟁' 이 동경영화제 본선에 진출했을 때 ( '하얀 전쟁' 은 대상과 감독상을 받았다)
, 필자도 동행한 한국팀에 당시 와세다(早稻田)
대에 유학 중이던 조용원이 찾아왔다.

조용하게 웃고 도란도란 말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어떤 아득한 쓸쓸함을 느꼈다. 옆사람의 귀띔으로는 슈퍼마켓 따위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학한다는 것이었다. 전철이 끊어진 자정 넘어 자리가 파한 뒤 그녀는 돌아갔다.

그리고 이 인터뷰를 하며 조용원은 그때 원룸으로 돌아갈 택시비가 없어 신주쿠(新宿)
역에서 오전 4시 넘어 오는 첫 전철을 기다렸노라고 털어놓았다.

동료 영화인들이 자리를 옮겨 밤새 왁자하게 술잔을 부딪칠 때 그녀는 인적 끊긴 플랫폼에 세 시간이 넘게 웅크리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조용원은 초등학교 1년 때 동국대 교수였던 아버지를 여의었다. 중학교 1년 때는 어머니마저 쓰러져 다음해 '순전히 돈을 벌기 위해' 미스 롯데에 응모, 당선해 아역배우의 길로 들어섰다.

고교 3년 땐 하명중 감독의 '땡볕' 주연으로 대종상 신인상을 받으며 스타덤에 다가섰다. 그리고 85년 운명의 사고를 당했다.

87년 강수연에게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씨받이' 의 주연으로 임권택 감독은 처음에 조용원을 생각했다고 한다 (강수연의 수상은 물론 그녀의 호연 때문이다)
.

조용원이 사고를 당하지 않고, 또 '씨받이' 의 주연도 맡았더라면 하는 부질없는 가정을 염두에 두면서 어린 나이에 '지옥' 엘 가본 한 여인의 상처 치유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그녀 말마따나 "힘들어 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일" 이 될 것이다.

- 사고 뒤에 활동을 재개하는 의지를 보였는데 왜 일본으로 유학을 갔나.
"외형의 상처보다 마음의 상처를 못 견뎠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나의 상한 얼굴에만 관심을 나타냈다. 연기자의 길도 불투명했다. 유학은 나의 주체적인 삶을 찾기 위한 선택이었다. "

- 마음의 상처란 무엇인가.
" '얼굴에 상처난 배우' 란 말을 나의 대명사처럼 쓰는 사람도 있었다. 길거리나 촬영장에서 나에게 호의를 보인다는 게 괴롭게 가린 얼굴을 들춰보는 식이었다. 자연히 언론 기피증.대인 기피증이 생겼다. 지금 같으면 담담하게 받아들일텐데 그때는 스무살의 소녀였다. "

-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꿋꿋이 버텼는데 마음을 어떻게 다스렸나.
"그때 서울시청 현관 위 벽에 아시안게임 앞으로 며칠, 서울올림픽 앞으로 며칠이라는 전광판이 있었는데 나도 하루하루 줄어가는 전광판의 숫자에 맞춰 몸을 추스르다 보면 완전히 나을 것이라고 마음 먹었다. 그런데 파파라치까지 따라붙어 마음의 상처가 더 깊어져 갔다. "

- 파파라치라니.
"내 얼굴의 상처난 쪽 사진을 찍어 잡지 같은 데 냈다. 충격이었다. 혼자 많이 울었다. 어린 나이에 사회가 너무 이상하게 보였고 무서웠다. 그 때문에 방송국 외에는 아무 곳에도 외출하지 않았다. "

조용원은 "지금은 마음이 심하다 싶을 정도로 괜찮아서 아줌마가 된 것같다" 고 말했다. 그래도 무의식에는 그 상처가 남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손님이 앉는 사무실의 소파를 자신의 상처난 얼굴이 잘 보이는 쪽으로 배치했다. 무의식 속에 있는 것까지 지우려는 의도다.

- 하이틴 스타로 또 '땡볕' 으로 잘 나가다가 사고를 당했는데 어린 나이였지만 병상에선 어떤 생각을 했나.
"외로움에 익숙한 소녀가 작품 속에서 다른 인물이 되는 게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그래서 대학(중대 연영과)
에 가서 '사람들' 을 정말 잘 연구해 연기자로 성공하고 싶었는데 사고가 났다.

그래도 병상에선 앞으로 연기를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은 한번도 하지 않았다. 얼굴만 갖고 배우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하는 어른스런 생각도 했다. 그러나 우리 풍토는 그렇지 않았고 나도 숨어버린 셈이 됐다. "

- 일본에 갈 때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
"90년 4월 와세다대 문학연구과의 연구 과정에 입학했고 92년에 예술학 전공으로 정식 석사 과정에 들어갔다. 혼자 방 하나 얻어 자취했는데 아는 사람이 없는 게 그렇게 편했고 공부가 재미있었다. 낯선 곳에 가니 사고 후에 거의 처음으로 마음이 잔잔해졌다. "

- 생활비나 학비는 어떻게 마련했는가.
"슈퍼마켓에서 아르바이트하고, 감마통신 같은 데서 조금씩 일을 했다. 또 일본영화잡지 '키네마 순보' 에 글도 쓰고 그랬다. "

- 외롭고 쓸쓸할 때도 많지 않았겠나.
"외로움이 체질처럼 몸에 붙어 오히려 외로움을 즐겼다고 해도 되겠다. 서점이나 영화관엘 혼자 다니다가 원룸에 들어서는 것을 그저 내 인생이라고 여겼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게 나한테는 자연스러운 것일 뿐이다. "

- 강수연씨 같은 동세대 배우들이 맹활약하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어땠는가.
"솔직히 부러웠다. 그러나 나에게는 선택의 폭이 없었다. 그저 공부 열심히 해 연기가 됐든 뭐가 됐든 영화 일을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자위했다. "

- 도쿄대 박사 과정을 수료한 걸로 알고 있는데 학위를 안따나.
"94년 와세다대를 졸업하고 잠시 귀국했을 때 사람들이 나에게 일본에 대해 많은 것을 물어보는데 나도 잘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앞으로 일본 관련 일을 할지도 모르겠고 해서 도쿄대의 사회정보학과 박사 과정에 들어갔다. 논문은 1차 합격했지만 내가 교수로 일할 것도 아닌데 굳이 쓸 필요가 있나 싶어 안쓰고 있다. "

- 귀국 후 여러 학교에서 제의한 교수 자리를 거절했는데.
"97년 귀국했다. 아는 게 한가지라도 열가지를 가르치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반대다. 체질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마침 인터넷 바람도 불고 해서 그런 쪽으로 영화 일을 하고 싶었다. "

- 아직 나이가 젊지만 이제 연기자의 꿈을 접은 걸로 보이는데 미련은 안남았나.
"미련이 왜 없겠나. 그러나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 풍토도 좀 고쳐야 한다. 일본에 있을 때 영화감독.배우.방송인으로 유명한 기타노 다케시가 오토바이 사고로 크게 다쳤는데 그 모습 그대로 방송에 나왔다. 그걸 보며 우리 풍토도 저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조용원은 연기의 미련 때문에 97년 12월 IMF 사태가 몰아닥쳤을 때 뮤지컬 '101 1004' 를 집 팔아 제작, 주연했으나 쫄딱 망했다.

그 후 주한 일본문화원 협찬으로 '일본영상문화연구회' 를 조직해 일했고, PC통신에 일본영화 콘텐츠를 제공하다 지금은 본격적인 인터넷 벤처 사업에 뛰어들었다.

지난해 12월에 법인으로 등록된 '원 앤 원 픽처스' 를 이끌며 올 1월 영화웹진 '시네버스' 를 출범시켰고, 이달 27일 일본어 교육 사이트인 '에두버스' 를 열 예정이다.

또 12월 개설을 목표로 한.일문화 포털 사이트인 '자코버스' 를 준비 중이다. 버스란 명칭은 가장 친숙한 대중 교통수단인 버스처럼 인터넷에 정보를 소통시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온라인과 오프 라인의 상호 보완 또는 상승 효과를 기하기 위해 주간지 '시네버스' 를 창간했다.

- 온라인 사업은 잘 돼 가나.
" '인터넷 영화 관련 사이트 톱 10' 에 늘 들어 있는 게 신기하다. "

- 자본금은 어떻게 조달했나.
"기관투자자들이 들어 왔다. KTB.SKC.일은증권 등이 투자했고 소프트뱅크 코리아도 투자에 참여했다. "

- 성공하리라고 보는가.
" '자신을 가져라' 고 늘 자기 암시를 건다. 배우의 길은 못걷게 됐지만 지금 하는 일을 위해 공부하지 않았는가. 꿈은 현실화를 전제로 꾸는 것이다. "

- 지나온 시절을 생각하면 오늘의 조용원은 어디쯤에 있다고 생각하나.
"인생이 챔피온 타이틀전처럼 12라운드라면 한 8라운드까지 버텨온 것같다. 참 많이 쓰러졌는데 어쨌든 일어난 것 아니냐는 생각도 든다."

조용원은 지난해에 이상한 생각에 휩싸여 자서전을 3백쪽 가량 쓰다가 덮었다고 했다. 이젠 죽어도 되겠구나 하는 불온한 마음이 닥치면서 "내가 누군가에게 힘을 줘야한다" 는 강박증에 얽매여 글을 썼다는 것이다.

그러다 "이제 시작인데 이게 무슨 짓이람" 하는 멋쩍은 생각에 그만 뒀다고 했다.

그녀는 영화감독만은 꼭 한번 해보고 싶다고 했다.

자신의 콤플렉스를 사랑하며 그 힘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렸으면 한다.

일본의 스모선수 중에 선천적 어깨 탈골증을 이겨내고 우리로 치면 천하장사에 오른 치오노 후지, 또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인 일본의 유명작가 마쓰모토 세이조 같은 인물들의 아름다운 콤플렉스를 그런 예로 들었다.

마쓰모토는 "아들이 '아버지는 왜 학교에 안다녔느냐' 고 물었을 때 '얘야, 인생에는 학력란이 없단다' 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 콤플렉스를 직시할 때마다 힘이 솟았다" 고 토로했었다.

이헌익 스포츠.문화 에디터 <leehi@joongang.co.kr>
사진:오종택기자 <ojt2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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